예술과 문화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를 이야기하다. 4

별별다방 2024. 2. 13. 13:03

7. 화가 공동체를 꿈꿨던 고흐.

여전히 가난하고 외로운 화가인 고흐는 자신의 방을 아뜰리에로 꾸미며 화가 공동체를 꿈꾸게 됩니다. 그래서 고흐는 파리의 친구들에게 아를로 내려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초대하죠. 그러나 그 초대에 응한 사람은 고갱뿐이었는데요. 고갱은 처음엔 고흐의 제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흐 동생 테오가 아를에 내려가 고흐와 함께 지내면 생활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하자 아를로 내려오게 된 것이죠. (고갱도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아를로 온 소식을 듣자, 그를 환영하기 위해 고갱이 머물 방을 꾸며주고자 합니다. 바로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을 장식해 놓는 것이었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해바라기입니다. 고흐는 고갱의 방을 장식해 주기 위해 4개의 해바라기를 그렸는데요.

고흐, 해바라기 1887.
고흐, 해바라기 1888.

 

왜 하필 많은 꽃 중에 해바라기였을까요?

그 이유는 고갱은 유년시절을 남아메리카에 보냈는데 그곳에 서식했던 꽃이 해바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일을 기억하고 있던 고흐가 유년 시절의 향수를 고갱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해바라기를 그렸던 것이죠.

 

8810, 고갱이 드디어 아를에 도착합니다.

그는 매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죠. 그러나 그 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자기애가 강하고 쌀쌀맞았던 고갱과  내성적이지만 주장이 강고 감정기복이 심했던 고흐는 서로의 성격 차이로 자꾸 부딪히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서로 그림을 바라보는 세계관조차 너무 달랐던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고, 심지어 고흐가 발작과 환각을 경험하는 것을 고갱이 보게 되면서 고갱은 고흐가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갱은 자신의 작품들이 파리에서 팔리기 시작하자 이를 핑계로 고흐를 떠나기로 하죠.

 

8. 한쪽 귀를 잃은 고흐.

1888.12.23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고흐와 고갱은 심하게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건인, 고흐의 귀가 잘리게 되는데요. 사실 고흐의 귀가 잘린 것은 스스로 자른 것인지 타인에 의해 잘린 것인지 아직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흐와 고갱이 주고받은 편지에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데, 사건의 전말을 콕 집어 말하지 않고 있어 우리로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고갱은 고흐와 싸운 직후 고흐집을 나와 옆집에 피신하게 되고 고흐는 자신의 잘린 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 가끔 만나던 라셀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게 됩니다. 고흐의 잘린 귀를 본 라셀은 기겁하며 경찰에 신고하게 되죠.

그리고 고갱은 다음날 새벽 바로 파리로 떠나 버리며 고흐, 고갱 두사람의 공동체 생활은 약 2개월 만에 끝이 납니다.

 

고갱이 떠난 후 고흐는 스스로 다시 그림을 그려보려 노력합니다. 정신증도 이겨보려 노력하죠. 그때 그린 것이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입니다.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1888.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1888.

 

그러나 고흐는 결국 정신질환이 계속 재발하면서 1989, 5. 36,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고흐는 입원하는 동안에도 불안과 발작이 계속됐지만 그림을 놓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1년 반 동안 그는 150점이나 되는 작품을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탄생한 대표적 작품이 병실 창문 밖으로 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그렸다고 전해지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밤하늘과 애도를 의미하는 사이프러스 나무, 반편 평온하고 고요한 마을은 그 당시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듯합니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다음해 18902, 그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환각증상이 남아있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고흐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이 그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3월 말까지 요양원에 감금됐죠.

하지만 고흐는 요양원에서도 그림을 그리는데 매진합니다.

 

고흐는 아를에 있던 2년 동안 간질발작과 환각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200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립니다.

고흐는 정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고흐가 10년 동안 작업한 작품과 그 시간을 계산한다면 36시간마다 한점을 그린 셈이 된다고 합니다.

고흐가 이렇게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는 동생인 테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시였는데요.

고흐는 평생 동생 테오의 지원을 받았는데 자신이 그림 1000개를 그려야 테오에게 받은 빚을 값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흐는 살아생전 800여 점의 그림을 남기죠.

10년간 매달 150만원씩 받은 총금액과 자신의 그림 한점을 팔았을 때 받는 돈을 해서 계산한 결과가 그림 1000점이었다고 합니다.

 

9. 세상이 고흐를 바라보다.

18903, 그의 나이 37, 파리의 전시회에 고흐의 그림이 10점이나 출품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고흐의 그림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죠. 고흐의 그림이 전시회 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시가 되고, 고갱은 그 "전시회의 주인공은 고흐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고흐는 평론가로부터 생애 처음으로 그의 그림에 대한 찬사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벨기에 브뤼셀 전시회에서도 고흐의 작품이 6점 전시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판매를 하게 되죠.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붉은 포도밭> 은 고흐가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매하게 된 작품입니다. 판매금액은 400프랑, 우리나 라돈으로 15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현재 붉은 포도밭의 감정가격은 950억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10. 화려한 불꽃, 져버리는 불꽃

고흐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점점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고흐의 몸과 정신은 점점 상태가 안 좋아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동생 테오가 추천해준 가셰박사로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의 오베르쉬아즈로 이사를 합니다. 그곳은 테오가 사는 곳과도 가까웠고, 가셰박사 또한 화가였기 때문에 고흐도 승낙했던 곳이죠. (그러나 고흐가 오베르에서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70일 뿐이었습니다. )

고흐는 이곳에서도 하루 한점씩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매진합니다. 이 당시 동생 테오도 지병으로 몸이 아프자 가세가 기울었고, 동생에게 의지하고 있던 고흐 역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반복되는 정신증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8907, 고흐는 자신의 불안과 정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합니다. 심장을 조준하고 쐈지만, 총알은 심장을 빗겨나가 즉사하지 않았죠.

고흐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여관까지 한참을 걸어와 쓰러집니다. 여관주인은 의사를 불러 고흐를 치료하고, 동생 테오에게 연락해 여관으로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음날 아침 테오는 곧장 고흐를 찾아왔고, 고흐가 숨을 거둘 때까지 마지막 12시간 동안 함께 얘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1890729, 고흐는 자신을 평생 지지해주던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죠.

그의 나이 고작 37세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를 지지했던 동생 반 테오역시 그가 죽은 지 6개월 뒤 건강 악화로 사망합니다. 테오 역시 34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죠.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고흐의 삶은 짧지만 아주 긴 이야기로 이렇게 끝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