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2. 13.

    by. 별별다방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서양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사람이고, 27살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지각생 화가이기도 하지요.

    그는, 그림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을 그려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단 한점의 작품만을 팔았을 뿐, 화가로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비운의 화가이기도 합니다.

    죽은 후에야 비로소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알려지게 된 고흐,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림에서만큼은 불멸로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고흐의 일생을 여기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반고흐의 자화상
    반고흐의 자화상 1889.09

     

     빈센트 반 고흐의 일생 : 1853.3.30~1890.7.29

    1.  고흐의 어린시절

    1853. 반고흐는 네덜란드에서 준데르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폐쇄적이고 엄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에 가족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 고흐 집안은 그림을 판매하는 미술상으로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특히 고흐 아버지의 큰형은 구필화랑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죠.

    고흐의 아버지도 목사였지만, 부임한 곳 교회 측에서 그의 집에 하녀, 요리사, 정원사, 마차 등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유년기는 부족함 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고흐에겐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이었죠.

    빈센트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의 이름이었는데, 부모님은 죽은 형의 이름을 그에게 그대로 물려주었습니다.

    고흐의 부모님은 이 이름을 부르며, 누굴 먼저 떠올렸을까요? 고흐는 자기의 이름이 아닌, 형의 이름으로 불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고흐는 죽은 형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합니다. 고흐는 어쩌면 살아있는 자신과 형의 망령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의 역할로 살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했을지도 모릅니다.

    고흐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 내놓지 못하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부모님에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고, 그럴수록 고흐는 점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갔죠.

     

    11, 고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먼 곳까지 보내진 자신이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부모의 묵살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더욱 외톨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애정에 대한 결핍과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좌절감 등이 그의 정신과 마음을 짓누르는 원인이 되어갔죠.

    어쩔 수 없이 고흐는 기숙학교에 머물며 공부했고, 그는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4개 국어를 아주 능숙하게 구사할 만큼 언어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2. 아트딜러로 새로운 출발

    16, 그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흐는 자신이 다니었던 학교에 대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말할 만큼 학교생활을 견디기 힘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얼마 후 고흐는 삼촌이 운영하는 구필화랑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아트딜러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구필화랑은 네덜란드, 영국 등 7곳에 지부가 있을 정도로 큰 화랑이었는데, 그는 이 직업에 애정을 가지고 7년이란 시간 동안 일을 하게 되었죠.

    그는 구필화랑에서 일하며,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좋은 작품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됩니다.

    특히 21살에는 밀레의 만종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동생 테오에게 "훌륭해, 이 그림은 시야"라고 말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었죠.

    밀레의 만종
    밀레의 만종, 1857~1859

    고흐는 일상적이면서도 따뜻한 농촌 풍경과 농부들의 삶에 대한 표현한 밀레의 그림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그의 초기 작품에서 밀레의 영향을 받아 그려진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흐에게 아트딜러로 일하던 시기는 그의 생애 가장 밝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트딜러로서 매우 인정을 받았으며, 이시기엔 자신의 조력자였던 테오를 오히려 고흐가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20살 즈음엔 그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했을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당시 고흐는 한달 100프랑 정도 급여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연봉으로 보면 약 1000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일반 근로자들이 평균 연 500만원을 벌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고흐의 급여는 꽤 높은 편이었던 것이죠. 아마도 그는 매우 실력 있던 아트딜러로 활약했던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의 삼촌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실력있는 고흐에게 화랑을 물려줄 생각이었고, 고흐가 아트딜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지 않았을 겁니다

     

    20,

    고흐는 구필화랑의 런던 지점으로 발령이 나게 됩니다. 그 당시 영국은 집약적으로 경제발전이 이뤄지던 시기로 빈부의 격차 역시 매우 심하던 시기였고, 고흐는 런던 길거리에서 사는 빈민들을 목격하며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부족함 없이 살던 그가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지만, 영국은 각지에서 일자리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길거리나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19세기 영국 런던, 벽돌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 그림
    19세기 영국 런던, 벽돌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

     

    허름하고 더러운 옷차림, 먹지 못해 마른 몸... 이런 상황을 목격한 고흐는 갑작스럽게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립니다.

     

    19세기 영국 런던, 귀족들의 호화스러웠던 야밤의 무도회 그림
    19세기 영국 런던, 귀족들의 호화스러웠던 야밤의 무도회

     

    반면, 귀족들이나 부를 쌓은 상인들은 후식으로 케이크와 차를 먹으며 지내지만, 슬럼가의 빈민들은 돈이 없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 런던의 모습이었습니다.

     

    도시 한쪽에는 배고픔에 자살을 생각할 만큼, 비참하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흐 자신은 가치가 없는 그림도 비싸게 팔기 위해, 고객들에게 감언이설을 하며 그림들을 팔아왔던 것이죠.

    고흐는 이런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며 부와 자신의 미래 등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겪게 됩니다그리고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종교에 기대게 되죠.

     

    22, 고흐는 아티딜러로 생활은 하지만, 그 생활에 환멸을 느끼며

    부의 수단으로 미술품을 상품화하는 손님들, 그림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손님들과의 마찰이 반복되었고 결국, 기독교에 심취해 미술품 거래를 혐오한다는 이유로 구필화랑에서 해고됩니다.

    그리고 고흐는 앞으로 자신의 삶을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빈민들을 돕겠다고 결심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