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2. 13.

    by. 별별다방

    3. 종교인으로 살아가다.

    고흐는 자신의 신념을 이행하고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시험을 치렀지만 입학 필수조건이었던 라틴어, 그리스어 과목에서 계속 낙제를 하여 목사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은 고흐는 어릴 적 4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만큼 언어에 재능이 있었는데, 하필면 고대어 과목이 낙제라는 것이 조금 이사한 부분이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흐를 이야기하는 한편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구휼을 중요시 하던 고흐는, 쓸데 없는 이론 공부로 시간을 보내는 신학교 과정에 동의할수 없다는 표현의 방법으로 일부러 낙제점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의 열정과 빈민들을 위하는 마음을 높게 산 지역 선교단체에서 빈센트에게 6개월간 임시직으로 전도사로 일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죠.

    그렇게 1878년 그의 나이 25세에 임시 선교사가 되어 보리나주 탄광촌의 전도사로 생활하게 됩니다.

     

    고흐가 간 곳은 유럽에서도 악명높은 탄광촌이었죠. 그곳은 고흐의 상상보다 훨씬 열악했고, 힘겨운 곳이었습니다. 일주일마다 몇 명씩 죽어 나가는 탄광촌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은 채 광부들을 도우며 지내게 됩니다.

    고흐는 선교사로서 지낼 깨끗한 집과 음식이 제공되었지만, 모든 걸 마다하고 광부들과 같이 천막에서 지내며, 광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광부들에게 나눠주며 주변에서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탄광촌 마을에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빈센트의 전도사 생활은 시작됐지만, 그의 전도사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탄광촌으로 시찰을 나온 선교단체로부터 목회자의 품위와 존엄성을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전도사 자격증을 박탈당한 것이죠.

     

    4.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27살, 동생 테오가 빈센트에게 직업화가가 되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합니다. 빈센트는 동생의 말을 듣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드디어 고흐의 화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죠.

    구필화랑의 유능한 직원이었던 동생은 고흐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고 매달 편지와 함께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지원은 고흐의 일생 동안 유일한 수입원이었는데,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매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50만원 정도를 보내줬다고 합니다.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던 아이는 아녔습니다. 어린시절 고흐는 오히려 곤충을 좋아해 곤충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 분류하는 등 과학자적인 면모를 더 보였던 아이였었죠. 그러나 그는 밀레의 만종을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을 이제 자신의 그림에 담고자 합니다.

     

    고흐는 전업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작업실을 만들고 그림에 열중했고, 가족과도 사이도 원만해 졌습니다.

    그러던 중 고흐는 부모님의 집에 잠깐 머물던 (사별한)사촌 누나에게 청혼하면서 또다시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그는 생각보다 그녀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은 고흐를 근친상간하려는 미친놈으로 취급해 버리죠.

     

    결국, 고흐는 188112월 가족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흐는 또다시 시엔이라는 매춘부를 사랑하게 되며 가족들과 또다시 불화를 겪게 됩니다.

    이시기 고흐는 외사촌인 안톤 마우베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었는데, 석고상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마우베와,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고흐의 의견이 대립하며 둘 사이는 금이 가게 되었죠. 결국, 마우베는 고흐가 매춘부인 시엔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와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또한,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모두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하죠. 심지어 고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드디어 미쳐버렸다며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습니다.

    고흐는 시엔과 동거를 시작했지만 그들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시엔에겐 매춘을 하며 생긴 자녀들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까지 함께 살게 되었으니까요.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는 가족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고 고흐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며칠씩 굶는 일도 늘어만 갔던 것이죠. 그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결국, 시엔은 생활고로 다시 매춘을 시작했고 이를 알게된 고흐는 시엔과 결별하고 다시 부모님이 있는 네덜란드 뉘넌(Nuenen)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30,

    고흐는 뉘넌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교회 뒤뜰에 헛간을 아뜰리에로 만들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뉘넌에 머무는 2년 동안 200점 가까운 그림을 그려냈죠. 고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그곳의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요. 무겁고 어두운 느낌의 작품이 주를 이뤘습니다.

     

    32, 1885년부터 86년까지 그는 헤이그에서 생활하며 생계를 위해 목재를 가공하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살았으며, 이런 환경의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에 담고자 했죠. 예전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느꼈던 그 감동 그대로 말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감자먹는 사람들>입니다. 고흐는 이 작품을 "나의 첫 작품"이라고 말할 만큼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이죠.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1885. 04

     

    이 작품은 빈곤하지만 평범하고 소박한 농촌 사람들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캔 감자를 손으로 먹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죠.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드디어 자신의 작품을 완성한 것에 매우 기뻐했지만, 어두운 색채와 무거운 분위기로 그림 시장에서 팔리 진 못했습니다.

    아트딜러를 하는 동생 테오에게 여러 점의 그림을 보냈지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흐는 헤이그에 있는 루르스의 가게에 작품을 전시하게 되었는데, 작품에 모델이었던 마을 소녀가 혼외 임신을 하게 되며, 용의자로 고흐가 지목되었습니다. 이에 마을의 성직자는 마을 주민들은 고흐의 모델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고, 고흐는 더는 뇌넨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죠.

     

    결국, 그해 11월 빈센트는 뉘넌을 떠나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정착합니다.

    고흐는 이때부터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동생 테오가 그림이 너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안팔린다는 말을 들은 그는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안트베르펜은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여서 다른 나라와의 교역품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도 안트베르펜 항구를 통해 들어오곤 했죠

    채색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던 고흐는 강렬하고 뚜렷한 색감의 우키요에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그림에도 밝고 채도가 있는 화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88633, 빈센트는 그림을 다시 배워보고자 안트베르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수업에 참여했지만, 빈센트의 자유롭고 파격적인 화풍과 왕립 아카데미의 정규교육은 서로 잘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빈센트는 더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입학한지 2달만에 파리로 떠나버리게 됩니다.